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2020년 4월)
둠벙을 만들었으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과연 다랑논을 세 칸을 다 살릴 수 있을까? 둠벙 바로 앞에 있는 가장 윗칸에서 겨우 모양만 지키던 논둑을 더 높고 튼튼하게 쌓았다. 마을 형님들이 울력에 참여해주었다. 여기에 벼를 심던 건 정말 옛날 일이고 그 사이 밭으로 개간해서 미나리, 참취, 얼갈이배추 등 여러 가지를 심어왔다고 들었다. 이 밭 모양을 논 형태로 되돌리려면 쟁기질을 해서 완전히 한 번 갈아엎고 반듯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옛날에 쟁기질은 소가 했고 요즘은 트랙터나 관리기로 한다. 여기는 큰 기계가 들어올 길이 없고 쟁기질 할 수 있게 훈련된 소는 더더욱 있을리 없다. 남는 방법은 삽질뿐. 논둑을 쌓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저 아래에서 낯선 어르신 한 분이 성큼성큼 걸어오셨다. 둠벙을 물끄러미 보더니 우리에게 화를 내셨다.
“여기 이거 누가 허락한 거요? 수압이 약해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야?”
농업용 호스에서 나오던 물은 그냥 흐르는 물이 아니었다. 물이 땅 속으로 스며드는 자리 바로 옆에 원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 분이 파놓은 우물이었다. 거기에 관이 연결되어 저 아래 식당까지 이어져 있었던 것. 음식 장사 하는 집에 물이 시원찮게 나오니 화가 단단히 나서 확인하러 오신 거였다.
여러 감정이 겹쳤다. 특히 여러 날 고생해서 만든 둠벙과 울력을 통해 만든 논둑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이자 허탈감이 찾아왔다. 땅 밑으로 흘러내리는 줄로만 알았던 물줄기가 사실 우물을 채우는 물이었다니. 미안한 마음, 답답한 마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한 마음, 두려운 마음 등등 정말 많고 복잡한 마음이 한 번에 찾아와서 혼란스러웠다. 한 번에 감당하기 어려워 하루는 남몰래 방에 콕 쳐박혀 숨어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평화를 몸과 마음에 품고 산다면서 이러고 있는게 나 스스로 너무 우스워보여서, 어느덧 자리잡고 엉덩이 디밀던 집착을 그대로 인정하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운이 막 솟아나거나 즐거운 상태가 아니더라도 할 일을 마저 해보기로 했다. 우물 주인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논을 찾아보기도 하고 옆에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퍼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펌프를 빌리기도 했다. 상황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어려운 만큼, 특별 훈련 하는 때를 보내고 있다 믿고 고마운 마음으로 기도했다.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2020년 4월)
오랫동안 기다려온 논농사가 코앞까지 와있는데 여기서 접을 수 없지. 여러가지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작전1. 물 같이 쓰기
우물 주인과 사이가 좋은 파란지붕집 연정쌤과 함께 식당으로 찾아갔지만,
밤이든 낮이든 어떤 조건이든 그 물을 쓰는 게 지금 당장은 안 될 것 같았다. 후퇴!
#작전2. 계곡물 끌어올리기
주변 어르신들이 바로 옆 계곡에서 물을 끌어 올려보라 하시고 때마침 연정쌤께서 수중 펌프를 빌려주셨다. 펌프가 작동하려면 웅덩이가 충분히 깊어야 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사이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돌을 옮기고 흙을 파고 둑을 쌓아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한참 낑낑대며 돌 옮기다가 앉아서 쉬는데 물 아래에 뭐가 꿈틀거렸다. 뭐지 하며 들여다보니 거기 물고기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좁다란 냇가에 물고기가! 감탄하자마자 그 아래에 또 뭔가 꿈틀거렸다. 맙소사, 가재까지! 멸종 위기라는 가재가 여기에 있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뭘 하고 있나? 멸종 위기 가재 집을 허물고 있네. 민망하다! 어쩔까? 어쩌긴 어째. 가재와 물고기를 앞에 두고 뭘 그리 생각하나? 암, 그래, 그렇지, 그렇고 말고. 당장에 그만 둬야지. 후퇴!
#작전3. 새로운 논 찾기
물도 없으면 논도 없으니 이제 논농사는 현실이 아니라 다시 상상이 되었...... 아니 바로 그때, ‘상상이 아니야’라고 말하듯 택배가 왔다. 버들방앗간 황진웅 선생님께서 보낸 볍씨가 도착한 거다. 이 무게, 꽤나 묵직하다. 쇠머리지장, 보리벼, 비단찰벼, 메산디, 붉은차나락. 토박이볍씨들 예쁜 이름을 보니 괜히 울컥했다. 이렇게 포기할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아니면 어때. 괜찮다. 다른 논이 있나 찾아보자.
새로운 땅, 빕새울에 같이 한번 가보자구 (2020년 4월)
예전에 벼농사 지었는데 지금은 힘들어서 못 하는 땅이 있다고 영규아저씨가 얘기했을 때 나는 둠벙을 만드는 데에 한창이었다. 다른 땅 소식이 귀에 들어올리 없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어디선가 맴돌다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시간되면 빕새울 논자리 보러 같이 가보자.”
영규아저씨는 요즘 한창 풀이 죽은 내가 안쓰러웠던지 다시 빕새울 이야기를 해주셨다. 예전엔 네 가마니나 농사짓던 땅인데 이젠 못 하겠다고. 밭농사라도 지어보려고 포크레인으로 가장자리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냈는데 워낙 진흙땅이라 밭농사는 안 된다고. 멋진 SUV를 타고 함께 가본 그곳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집에서 걸어가면 10분 정도 거리. 다랑논 두 칸이 울창한 산 속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혹시 해보려거든 마음껏 쓰라는 말에 조금 망설여졌다. 앞선 경험도 있으니 어쨌거나 시작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건을 따져봐야할텐데, 당연히 물을 먼저 찾아보았다.
“여긴 건수가 솟는 골짜기니까 물 나오는 자리 보고 길만 잘 만들면 되지 않겠어?”
밭이 바짝 마른 이 시기에 촉촉하게 젖어있고 여기저기 물이 고여있고 가장자리 도랑에 물이 차있는 신기한 곳이었다. 풀이 많이 나있긴 했어도 이런 땅은 처음 봤다. 벼를 논에 곧뿌릴 게 아니면 모를 키울 못자리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이미 그 시기가 되었으니 고민을 길게 할 순 없었다. 볍씨를 다시 돌려보내느니 여기서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땅강아지 논이야 (2020년 4월-5월)
빕새울을 만나고서 다시 바빠졌다. 갈퀴로 지푸라기 긁어내니 땅 모양이 드러나는데 그럭저럭 평평하다. 문제는 가장자리에 파여있는 도랑. 일단은 삽을 들었다. 밭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삽과 낫과 호미로만 농사지었는데 이 논은 기계를 쓰지 않으면 모내기 때까지 다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 굽히고 마을 트랙터를 빌려서 다른 밭 갈아드리며 사용법을 미리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트랙터는 만일을 대비해 연습하는 거고 역시 삽으로 일구는 게 제 맛이지! 흙 푹푹 퍼서 도랑으로 툭툭 던지는데 첨벙첨벙 튀는 물 아래로 뭔가 꿈틀꿈틀 헤엄쳐 도망간다. 저 귀여운 움직임은, 땅강아지! 스물 아홉, 처음 농사짓던 시기에 거창에서 보았던 땅강아지를 거의 일곱 해만에 다시 만났다. 한 삽에 한 마리씩 나올 정도로 땅강아지가 참 많았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여긴 땅강아지논이야. 왜냐구? 땅강아지가 정말 많이 살거든.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땅강아지며 여러가지 다양한 생명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땅이 될 거야. 당장은 삽질 때문에 괴롭히는 듯 느껴져도 그 무게 함께 짊어지고 한 삽 한 삽 떠서 되돌리자. 우리가 다 함께 살던 땅을.”
‘못자리 만들고 모내기 전까지 도랑 메우면서 삽으로 갈아엎으면 분명히 물이 찰 것 같다. 뭔가 되기는 되지 싶다.’
그런데 이건 비가 안 올 때 마른 땅 밟으며 하는 생각이다. 논 흙과 밭 흙은 정말 달랐다. 특히 이런 뻘논은. 비가 이틀정도 내리니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농부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비올 때마다 논둑을 걸어다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쑤 신나게 ‘논’다 #3>에서 계속...
2020.07.15 / 글쓴이 생똥상원
'마을 소식 나눔 > 키움과살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쑤 신나게 '논'다(4) (0) | 2021.01.26 |
---|---|
얼쑤 신나게 ‘논’다(3) (0) | 2020.10.22 |
얼쑤 신나게 ‘논’다(1) (0) | 2020.07.15 |
<귀농통문> 여름호에 없이있는마을 논 이야기가 소개되었어요 (0) | 2020.07.09 |
밥상기도문 - 밥상에서 비는 말 (0) | 2020.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