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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소식 나눔/마을소식

관계를 통해 필요를 채우다 - <없이있는장터>

손쉽게 물건을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장 보러 갈 시간이 없어도 잠들기 전 터치 몇 번이면 다음날 새벽 문 앞에 원하는 물건이 도착한다. 물건을 이고 지고 나를 필요도 없고, 같은 상품이어도 어디서 사야 저렴한지 한눈에 비교해서 보여주기에 합리적인 소비처럼 보인다. 그뿐인가. 배송시켜 받아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묻거나 따지지 않고 배송비 없이 바로 환불해 주기도 하니, 사람들과 부대끼며 껄끄러운 소리 하는 걸 피하는 이들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주는 셈이다.

나 역시도 도시에 살며 일하랴 공부하랴 마트 여는 시간에 짬을 내기 어려워 그러한 플랫폼을 참 많이 이용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고민 없이 사버리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저렴하니까, 일단 받아보고 별로면 환불하면 되니까, 가벼운 터치 몇 번에 엄지 손가락 꾹 눌러 쉽게 결제했다. 이사할 때 보니 그렇게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이 창고 한 가득이었다. 몇 천 원, 만 얼마씩이니 큰 지출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 모아 따지고 보니 꽤 컸다. 공짜라고 쉽게 생각했던 택배가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물류센터 안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비윤리적인 노동 환경에 놓여있는지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근처의 이웃과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앱도 많이들 이용한다. 새로 사려면 몇 십만 원이 깨지는 것도 훨씬 저렴한 가격에 얻을 수 있고 운 좋으면 무료 나눔으로도 얻을 수 있으니 나 역시 많이 찾았다. 하지만 창고에 처박아 놓고 안 쓰는 물건 중 상당수는 이렇게 얻어 온 중고 물품이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써왔는지 모르는 물건이기에 막상 받아 오면 쓰기 어려울 만큼 망가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역시나 저렴하게 또는 무료로 받아오는 것이라 얼마나 필요한지 깊은 고민 없이 가져온 탓에 막상 잘 쓰지 않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없이있는마을에 온 뒤로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당근이나 쿠팡 같은 앱을 먼저 열기보다 마을 사람들에게 먼저 묻는다. 서로의 집에 수저 개수 아는 걸 넘어서 숟가락과 접시 놓는 위치까지 알만큼 왕래가 잦으니, 이 물건은 어느 집에 있겠거니 하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한 번 빌려다 쓰고 반납하기도 한다. 머리를 자르는 미용도구는 인기가 많아 원래 주인의 집에 있는 경우보다 다른 집에 있는 날이 더 많다. 소비를 통해 필요를 채우지 않고 관계를 통해 필요를 나누고 채우는 셈이다.


매년 봄에는 없이있는장터를 연다. 더 이상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내놓으면 필요한 사람이 가져간다. 일종의 아나바다 같은 장터인 것인데, 우리 마을만의 독특한 몇 가지 규칙과 문화가 있다.



일단 낼 수 있는 물건이 정해져 있다. 마을의 얼과 삶에 어울리는 물건을 내놓는다. 게임기나 스마트폰처럼 어린이나 푸른이들이 혹 할만한 물건은 내놓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필요한 어른 지체들이 장터가 아니어도 서로 알음알음 주고받기에 굳이 푸른이들(마을 청소년 친구들)의 마음을 시험에 빠뜨리지 않는다. 컴퓨터 화면만을 들여다보는 게임기 대신 윷놀이나 공기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떠들 수 있는 대안적인 놀이문화를 만들어가고 있기에, 그러한 움직임을 해치는 물건은 마을 밖에 내놓는다. 나 역시 명절에 회사에서 받은 GMO 식용유나 가공육 통조림 역시 당근마켓에는 내놓아도 없이있는장터에 내놓지 않는다.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의 개수도 정해져 있다. 공짜라고 무분별하게 손에 집히는 대로 다 가져가지 않도록, 한 명이 가져갈 수 있는 수량을 제한한다. 스티커를 세 개씩 나누어 주고 가장 가지고 싶은 물건 세 개에 스티커를 붙인다. 여러 개의 스티커가 붙은 물건은 가져가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 스티커를 신중하게 붙여야 한다. 남은 스티커가 적어질수록 물건을 더 꼼꼼하게 살핀다. 옷을 입어도 보고, 물건들은 요리조리 살피며 내게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가져가면 잘 쓸 물건인지 고민한다.

3개만 골라야하기 때문에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저렇게 맞지도 않는 옷을 가져갈 수는 없다. ㅎㅎㅎ


없이있는 장터의 백미는 단연 겨루기 시간이다. 여러 개의 스티커가 붙은 물건은 각종 놀이를 통해 주인을 가려낸다. 쉽게는 가위바위보나 묵찌빠를 하기도 하고, 그림 그려 알아맞히기, 단어 알아맞히기 등의 다양한 놀이를 한다. 별거 아닐 것 같아도 어느새 여느 경매장 못지않은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물론 잔뜩 긴장한 채로 진지하게 승부에 임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그 어떤 예능 프로그램보다도 재미있다. 나는 이번 장터에서 가방 하나와 우비를 얻었다.

겨루기 끝에 승리한 자들의 환호. 이렇게 기쁠 일인가 싶다. ㅎㅎㅎ


몇 년째 매년 장터를 열다 보니 다른 지체들은 이제 내놓을 물건이 남지 않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올해 이사 오면서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많이 들고 왔다. 마을로 이사오던 때에 근무하던 사무실도 함께 이사했는데 창고에 있던 물건을 모조리 버린다고 하는 게 아닌가. 들고 가도 어차피 애물단지고 쓰레기라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기념품으로 만들었던 공책, 앞치마, 행주, 마우스패드 등 쓸 만한 좋은 물건들이 가득한데 그걸 다 버린다고 하니 너무 아까웠다. 모조리 챙겨다 장터에 내놓았더니 인기가 좋았다. 집집마다 우리 회사 로고가 박힌 앞치마를 두르고 있고, 책 공부 시간에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우리 회사 이름 적힌 공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난다.


없이 있는 장터는 1년에 한 번 크게 열리지만, 일상에서 작게 열리기도 한다. 마을 누리집에 ‘없이 있는 장터’ 게시판이 있다. 창고 정리를 크게 했다거나, 이사를 했다거나, 대청소를 했다거나 하는 일이 있으면 어김없이 글이 올라온다. 놀이로 새 주인을 찾던 것과 다르게 선착순 댓글로 새 주인을 찾는다. 고민하는 사이에 원하던 물건이 다른 사람에게 가버릴 수 있으니 옆지기와 빠르게 소통해야 한다. 나는 이번에 이사 온 수지 언니에게서 34인치 모니터를 얻었다. 새 제품을 사려면 돈 오십은 주어야 하는 고가의 물건이라 몇 년 동안 눈독만 들이고 있었는데 게시판에 올라왔기에 냉큼 낚아챘다. 지금 이 글도 얻어 온 모니터로 쓰고 있는데, 고개도 어깨도 눈도 편한 게 아주 좋다. 또 누군가 이사 오는 날이 기다려진다.

자매방에서 함께 사는 옆지기들에게 장터에 나온 물건 들여도 되는지 조심스레 물어보는 나 (좌) / 결국 나에게 온 34인치 모니터! (우)

 

-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