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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소식 나눔/키움과살림

지금 우리가 함께 모여 논농사를 하는 이유

#지구를 따뜻하게 하는 논농사
수년 전 서양 학자들은 물을 담아 농사를 짓는 기존의 논농사 방식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메탄을 대량으로 발생시킨다고 발표했다. 나뭇가지나 풀, 동식물의 사체가 논에 담긴 물에 의해, 정확히는 그 안에서 활동하는 작은 생물들에 의해 분해되며 메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환경부의 2018년도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배출되는 메탄 중에서 벼농사의 비중은 22.5%를 차지한다. 뭐지? 모내기나 벼베기가 이제야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논농사를 지으면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악당이 되는 것인가. 참 기운빠지는 소식이다.

<사진1> 설 환경부에 따르면 2018년 한국의 메탄 배출량은 2800만t으로 추산된다. 분야별로는 농&bull;축&bull;수산(1220만t), 폐&nbsp; 기물(860만t), 에너지(630만t) 등에서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메탄 배출원별 배출량 비율(2018년 기준). 환경부 제공

한반도에서 길러 먹은 농작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게 바로 벼다. 그럼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벼농사를 지은 나라는 어디일까?

이럴수가, 맙소사. 우리나라다. 1997년 겨울,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무려 1만 5천년 전의 재배법씨가 발견되며 관련 학계가 발칵 뒤집어졌고, 현재는 전 세계 고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개론서 <Archaeology> 에 벼의 기원지로서 한국 소로리가 명시 되어 있다.

 

아니, 1만 5천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벼를 길러 먹었고 물을 채워 논농사를 지은 건 4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제와서 기후온난화에 논이 한 몫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사실, 위 그림 보면 알겠지만 저렇게 단순하게만 펼쳐놔도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논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걸 알 수 있다.

<사진2〉UNEP와 CCAC가 2021년에 발표한 전 세계 메탄 배출의 조사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과 CCAC(Climate and Clean Air Coalition)가 2021 년 세계 메탄 발생원을 조사한 결과, 가축(32%), 석유와 가스(23%), 쓰레기매립과 폐수(20%), 석탄(12%), 벼농사(8%), 기타(5%)로 구분하였다. 전 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메탄에 대해 논이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더 줄어든다. 물론 물이 담겨있는 논은 물이 안 담겨있는 논보다 메탄을 훨씬 많이 발생시킨다. 문제는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분절화된 사고방식이다. 분류와 숫자로 정리된 통계는 사람들을 헛갈리게 만든다. 통계에 표시되지 않는 복잡한 체계는 쉽게 지나쳐버리게 된다. 단순한 예로 우리 정부가 국제메탄서약(Global Methane Pleadge)에 가입한 이후 농림부에선 저메탄 논농업을 표방하며, 벼가 자라는 사이 논에서 물을 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방법으로 메탄 배출량이 줄었으니 메탄감축이란 
유일의 목표는 이루었으나 물이 빠진 논에서 또 다른 온실가스 중 하나인 아산화질소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였다. 
한 가지 사안, 한 가지 숫자만 보고 전체가 어우러진 관계망은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3> 논에서 죽은 꿀벌도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식물의 양분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메탄이 발생한다.

논에서 발생하는 메탄은 줄이자고 난리치면서, 밥상에 고기 반찬(메탄발생률 1위 요인)이 없으면 인권까지 운운되는 이상한 분위기. 이런 사고방식은 사회 깊숙한 곳까지, 파편화된 구조로서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분절된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참 쉽다. 사회 구성원들이 분절된 사고방식을 많이 훈련하고 연습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분절되고 파편화된 생활양식을 반복하고 숙달하며 몸에 익히면, 몸에 밴 것이 자연히 생각하는 길을 만든다. 소비하는 주체로서 점점 파편화되며 ‘개인’이라는 개념이 너무 절대화되었다. 관계를 바탕으로 생각하는 힘이 너무 약해졌다. 정확히 분리된 공간에 살고 피상적인 직장구조 속에 긴 시간 머물며 성실하게 훈련한다. 지하철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타도, 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해도 개인이라는 경계 는 강력하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데 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다. 아무리 가까워도 사막의 모래처럼 하나로 뭉쳐질 수 없는 홀알 상태가 대한민국 국민의 자화상이다. 


그럼 반대로 통전적인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조금씩이라도 어떻게 바꾸어갈 수 있을까? 이것도 너무 간단하다. 통전적인 생활양식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몸에 익히면 그렇게 생각하는 길이 머리 속에도 만들어진다. 생각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몸을 길들이는 편이 훨씬 낫다. 통전적인 생활양식이라고 하면 말이 너무 어렵나? 서울에서 탈출하여 시골 언저리에 공동체 식구들과 자리 잡고 산지 10년도 채 안 된 내게 상징적인 통전의 자리는 ‘논’이다. 

<사진4〉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빕새을에 숨어있는 땅강아지논

#냄새가 나는 논

논농사 지어본 사람은 안다.그 미끈한 뻘흙을 밟고 서면 비릿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민다. 2020년에 난생처음으로 논이라는 땅을 밟아봤다. 그전까진 친환경이나 유기농 논은 1급수가 담겨있는 줄 알았다. 깨끗한 물에서 깨끗한 벼가 자랄 거라는 생각은 논 생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맨손으로 만지면 반나절 동안은 손에서 요상한 비린내가 났다. 심지어 논에는 기름도 뜨니까 누가 해코지 했나 싶어서 골몰한 적도 있다. (기름성분은 흙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생태계다. 말도 안 되게 다양한 생명들이 모여들고 어우러지고 죽고 태어나길 반복하는 곳이다. 논에서 죽은 생명은 물 속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밥으로 변해간다. 그 과정에서 메탄도 나오고 기름 성분도 나오고 냄새도 난다. 사람들 삶이랑 다를 것 하나 없다. 우리도 커다란 관계망 속에서 다른 생명을 먹고 또 여러 의미에서, 냄새나는 똥도 싸며 산다. 지극히 당연한 삶의 한쪽 모습일텐데 단, 우리도 다른 생명을 살리는 밥이라는 사실은 까먹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사진5,6> 3월의 어느날, 도롱뇽이 논 여기저기에 알을 낳았고, 땅강아지는 논둑에 구멍을 내고 있다. 

사람도 밥이다. 쌀만, 식물만, 동물만 밥이 아니다. 사람도 다른 생명을 위해 밥이 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밥이 되는, 이 논이라는 작은 생태계에 없이있는마을 구성원 모두가 끼어들었다. 빕새울이라 불리는 산 속 골짜기 한 가운데, 아주 오래된 다랑이논 두 칸. 물을 끌어올 곳도 없는 열악한 산골짜기지만 비가 오면 물이 차 오르고 또 산이 먹은 빗물이 논 한쪽 구석에서 솟아오른다. 넉넉하진 않아도 조금이나마 끊어지는 법이 없다. 그러니 온갖 생명이 모여들고 기다리고 기대어 살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우리도 여기에 발을 들였다. 방치된 곳을 다시 논으로 살리겠다고 애쓰며 뚝새풀, 한련초, 땅강아지, 지렁이, 장구애비, 또 유혈목이, 고라니, 멧돼지 등등 많은 동식물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동시에 돕기도 했다. 그러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이 생태계와 충분히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논농사를 제대로 알려준 적도 없고, 트랙터로 쟁기질 한 번 한 적 없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몸 속에 피 속에 세포 속에 1만 5천년 전부터 길러온 논농사의 감각이 있다. 이 땅과 생명들 틈에서 어울리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존재를 ‘나’에서 쉽게 분리하는 잔인함은 원래 사람의 본성이 아니다. 땅강아지논에 놀러와서 함께 울력하다보면 이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사진7>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논농사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분절화된 사고방식은 농토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즘은 어딜가나 유기농이나 무농약 표시가 된 농산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기농이나 무농약 농산물은 말 그대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농산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름은 무농약인데 농약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합성농약이냐 친환경적인 농약이냐, 단순하게는 그런 차이일 뿐이다. 인증제도의 이름을 웃기게 지어놓은 바람에 오해하기 쉽다. 유기농 영농조합의 실무자로 일한 경험이 없었다면 나 역시 아직 헛갈렸을지 모르겠다.


광복 후 DDT 수입을 기점으로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에서 합성농약을 활발히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 화학비료도 보급되어 절대적인 농업필수품목으로 자리 잡았다. ‘퇴비 안 주면 농사 안 돼.’ 라든지 ‘잡초가 있으면 양분을 뺏아가서 안돼.’ 같은 말을 요즘에도 종종 듣는다. 이 어르신들이 한창 농사짓던 시절, 화학비료와 합성농약 그리고 제초제의 등장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생산량은 미친 듯이 늘어났고 일손은 줄어드니 그만큼 농토를 늘려 자녀들 대학보내고 시집장가 보냈다. 그 선택으로 논과 밭에서 함께 살던 생명들은 목숨을 잃어갔고 터전을 빼앗겼다. 애초에 화학비료라는 것은 생태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특정 식물이 잘 자라는 데에 필요한 몇 가지 무기물 성분을 대량으로 쏟아붓는 방식이다. 수확의 폭발과 함께 땅을 이루는 성분은 불균형이 생기게 되고 특정 성분을 좋아하는 특정 생물만 독식하며 다양성을 잃게 되고 그에 따라 병이 와도 단번에 모든 밭이 병들어버리는 악순환이 생겼다. 그 사이 농약과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미생물과 작은 곤충들 때문에 더 강한 합성농약과 제초제가 필요하게 되고, 분절화된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는 결국, 벌레와의 전쟁, 균과 병과의 전쟁, 말 그대로 끝없는 전쟁이다. 


친환경농업이 유행을 하며 상황은 아주 약간 완화되었다. 하지만 재료만 바뀌었을 뿐 방식은 거의 같다. 유기농업에서는 씨앗을 받을 수 없는 개량된 종자를 해마다 구매하여 사용한다. 제초제 대신 검은 비닐과 부직포를 빈틈없이 깔아버린다. 예로부터 하농은 풀을 키우고 중농은 수확을 잘하는데 상농은 땅을 살린다고 했다. 지금의 초점은 오로지 수확과 소득, 환금성에 있다. 아무렴 도시라는 방식는 어떻겠나. 땅을 돌보고 살리는 노력, 즉 관계망과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고 돈벌이에만 목을 메는 중농이 되거나, 나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거야 라며 대충 흉내만 낸 뒤 방치하는 농부가 되면 논과 밭은, 이 사회의 토양은 순식간에 엉망이 된다. 통전적으로 생각하며 살지 않고서야 전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2020년, 2021년, 2022년 그리고 2023년.  
없이있는마을은 올해 또 여기저기서 친구들 지인들을 불러 모아 왁자지껄 벼를 심었다. 산 속에 있는 땅강아지논 두 칸에는 붉은차나락과 흰베 등 독특한 이름과 개성을 가진 토종벼가 자리 잡았다. 천수답이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 빗물 받아서 손으로 농사짓는 논이다. 이제 해마다 경험이 쌓이니 대략 6월 초가 되면 모심기 할 수 있게 큰 비가 내린다는 것도 안다. 음머 누렁이도 없고 트랙터도 안 쓰니 땅이 딱딱해서, 모를 푹푹 꽂아넣는 모내기는 기대하기 어렵지만 무사히 걸어다닐 수 있다.

<사진8> 2023년 6월, 없이있는마을과 지인들이 한데 모여 볏모를 심고 있다.
<사진9,10> 손모내기는 너무 재밌어서 어린 아이들도 무척 좋아한다. 

2020년에 거둔 보리벼, 쇠머리지장, 붉은차나락, 메산디를 빼면 그 이후에 농사지은 벼는 함께 먹어보지도 못했다. 첫 해는 심하지 않았는데, 둘째 해부터 고라니와 멧돼지 그리고 새들에게 소문이 난 것 같다. 9월부터 논에서 동물들의 추수감사잔치(!?)가 벌어지면 몽땅 헌납하고 남은 것 알뜰하게 모아 볏짚과 씨앗만 남기는 수준이었다. 거창이란 곳에서 농사를 처음 배우던 20대 마지막 해에, 산 속에 버려진 다랑이논을 본 적이 있다. 벼농사 지어보고 싶어서 저기 살려보자며 선생님께 여쭤봤지만 고라니 때문에 농사 못 짓는다고 했다. 지금 딱 그 상황이다. 이 동물놈을 잡아서……죽여? 처참하게 짓밟힌 벼들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까지 들 때가 있지만 아기 고라니가 가끔 옆에 다가와 까칠까칠한 털로 기댈 때마다 결국 돌려보낼 수 밖에 없더라. (올해도 벌써 세 마리의 아기 고라니를 만났다) 커다란 동물들이 뜯어 먹고 남은 볍씨들. 그러나 그것이 수확의 전부라고 여겼다면 우리가 과연 계속 벼농사를 시도할 수 있었을까? 땅강아지논을 만나고 무려 넷째 해다. 우리는 또 신나게 모를 심었다.

<사진11> 길 잃은 아기 고라니가 겁도 없이 옆에 앉았다. 후&hellip;&hellip; 귀여우면 안돼. 귀엽지 마라. 귀엽지&hellip;그렇지.

#아름다운 삶의 모습, 어울림
이 글은 논에 대한 것이니까 논 이라는 틀 안에서만 주로 이야기하지만 통전이란 것은 문학으로 치면 플롯같은 거다. 구슬에 실 끼우듯 개별 사건과 요소들을 하나로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내는 걸 문학에선 플롯이라 한다. 관계 없을 것 같은 두 인물도 플롯을 이용해 한 이야기의 관계망 속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통전적 세계관 속에서는 어울리지 못할 존재란 없고, 배제할 이유도 없다. 단순하게는, 수확량이나 돈처럼 숫자 혹은 통계를 남기는 게 아니라 한 편의 이야기를 남긴다. 논은 우리 마을이 일궈가는 통전적 삶의 다양한 구슬 중 하나이며 동시에 논 그 자체로도 셀 수 없는 구슬을 이미 담고 있다.

 

논에서 어울림을 배우며, 이 생태계의 주인이 아니라 공동창조자로서 감각을 키우게 되면 메탄 배출의 문제는 아직도 변하지 않은 내 도시적 생활양식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음을 시인하게 된다. 생태계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태계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짧은 거리도 차를 타고, 비닐과 플라스틱에 담긴 먹거리를 이용하며, 굳이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우리의 습관이 지구 대기중의 80% 정도의 메탄을 발생시킨다. 인간이란 생명이 인간 답게 살기 위해서 온실가스를 어마어마하게 내뿜어 결과적으론 인간이 인간 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현실. 이 얼마나 황당한 아이러니인가.

<사진12> 100년 사이 급증한 대기 중 메탄 농도

#’논 하나님’과 예수운동
성경에서 하나님은 창조자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생명을 태어나게도 하시고 또 죽게도 하신다. 신이란 그야말로 논처럼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는 커다란 시공간 그 자체이며, 통전적으로 생명의 뜻을 펼치는 이야기꾼이다.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뜻에 따라 엄청난 이야기를 남긴 예수도, 이후에 펼쳐진 예수운동도, 그 속 뜻은 ‘생명을 생명 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에 있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예수가 땅에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 마치 맹인의 눈에 바른 사건은 토기장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일주일의 천지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당찬 선언이다. 물론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만 고쳐 주셨고 사람만 만져주셨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눈은 자연을 깊게 관찰했고 환경적인 변화를 터득했으며 씨앗이 자라는 원리나 생명의 순리를 잘 알고 계셨다. 당시 지구 생태계는 걱정할 일 없을 정도로 건강했고 사람들도 자연을 과하게 훼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구가 위험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영향으로 기후와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며 현재 지구에서 살고 있는 생명체 모두가 위험에 처했다. 사람을 살리려면 지구를 살려야 한다. 벌어지는 현상들을 쫓아가보자. 계속 같은 범인을 마주하게 된다. 인간의 분절화된 사고방식을. 

 

예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시면 아픈 이들 고치시며 사람에게만 찾아가실까? 그럴리가 없다. 예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 온생명이 어울리는 통전적인 삶의 형태를 구현하고 전도하는 운동을 하실 거라 믿는다. 어떻게든 수확을 많이 해서 돈을 버는 것,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에 영향을 끼치고 헌금 많이 내는 것으로 신앙의 길을 찾는 것은 한참 전에 지나간, 과거의 방식이다. 상징적 의미에서 ‘흙’을 살리고, 서로 살리는 관계와 순환을 되찾는 것, 지금 우리 시대에 진정으로 기쁜 소식은 그런 삶의 회복이다.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의 말마따나 예수님이 지금 한국에 오신다면 십자가를 지는 대신 시골 농부가 되어 거름 만들 똥짐을 지실지도 모른다.

 

<사진13> 모심는 날, 함께 모여 각자 소개도 하고 토종벼 이야기도 나눴다.

#땅강아지논학교
없이있는마을은 어른들만 주인공으로 살지 않는다. 마을학교를 열고 마을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배움터를 시도하는 중이다. 지금은 방과후학교의 형태로 운영한다. 다섯, 여섯가지 정도 정규과목이 열리는데 그 중 농생활 과목의 이번 학기 주제는 ‘땅강아지논학교’다.

<사진14> 없이있는마을의 민들레학교 2023년 여름학기 농생활 공부 얼개

아이들과 함께 땅강아지논의 생태를 조사하고 기록한다.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혹은 쉽게 지나쳤던 생명들과 새롭게 인사 나누고 우리도 결국은 논에 모여든 생명 중에 한 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생명이 함께 어우러지며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다. 아이들이 묻는다.

 

“관찰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논에 풀 뽑는 울력 하는 거 아닌가요?” 
“음, 그것도 좋은데?”
“으엑.”

 

사실 논에 가면 논 일 하고 싶어 진다. 동물들이 건드려서 쓰러진 벼가 있으면 단단하게 세워주고 싶고 한련초가 왕성하게 번지기 전에 잠재우고 싶다. 올해는 수확도 좀 해서 오랜만에 다 같이 이 밥 좀 먹어보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길도 바라본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구분된 길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해마다 이 논을 일구며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간다. 수확보다 더 큰 수확, 어우러지는 삶 그 자체로서 땅강아지논학교다.

 

올해도 이야기거리가 끝이 없다. 새벽 내내 모여서 다양한 농기구로 김매기 실험한 기억, 저기 위에까지 올라가 있는 물 없는 물 다 끌어모으려 길 만들던 기억, 논둑 보수하다가 말 한마디에 오해가 생겨 싸웠던 기억, 나란히 죽어 있는 뱀 두 마리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탐정이 되었던 기억, 임시로 만든 뒷간에서 똥 눈 기억, 모심기에 온 친구들에게 그럴싸하게 설명하려다 어버버버 말 길어지던 기억. 논은 눈에 보이는 생명이 모이는 장이면서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모이는 장이기도 한가보다. 활기찬 기억이 한 가득이다. 우리는 논이라는 틀 안에서 정말 많은 일을 겪고 관계를 감각하며 살아간다. 며칠 전에 엄마고라니와 아기고라니가 땅강아지논을 찾았다. 인기척에 깜짝 놀라서 쌍으로 후다닥 뛰어 달아나는데 양쪽에서 밟히는 벼 때문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때론 억울하기도, 때론 마음이 상하기도 하지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지나고 나면 추억으로 남는다.

 

<사진15> 여러 농기구로 풀 매는 실험을 하고 있다.
<사진16> 논둑아, 올해 비가 많이 온다는데 잘 버텨다오!
<사진17> 임시로 만든 뒷간은 위 아래로 통풍이 잘 되었다.

관계를 끊는 삶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삶을 살고 싶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혹은 미생물이든 끊어내는 삶이 아니라 만나서 잇는 삶을 살고 싶다. 너랑 나랑 아무 상관없이 사는 게 아니라 너랑 나랑 함께 살고 싶다. 메탄가스가 나온다 한들 함께 사는 방법을 알려주고 통전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논은, 세상의 메탄을 근본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중요한 해결책이다. 논에서 발생하는 메탄은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손으로 논 농사 많이들 지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리처럼 시골 마을에 모여 살아야 한다. 사실 논도 논인데 어디서든 파편으로 살지 말고 모여서 알콩달콩 살라는 얘기가 하고 싶다. 서울에서 사네 죽네 하며 겨우 겨우 버티지 말고 모두들 한적한 시골에서 소꿉놀이 하듯이 즐겁게 살면 좋겠다. 우르르 몰려가 손모내기하고 뻘논에 엉덩방아찧으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 혼자라도 시골가서 집 짓겠다고 아등바등 돈 모을 게 아니라 뜻 모으며 같이 공부할 동지부터 찾으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그럼 돈이란 괴물도 점차 만만해진다. 함께 사는 삶, 서로 살리는 삶은 그 자체로 핵심적인 예수운동이다. 관념이나 이벤트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실제의 운동이다. 예수는 지금도 제자들을 찾으신다. 논? 마을? 교회? 새로운 삶? 간절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 지길 빈다.

<사진18> 우리랑 함께 살아요!

글쓴이: 생똥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