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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소식 나눔/키움과살림

얼쑤 신나게 ‘논’다(6) - 마지막 이야기

10월 6일, 무엇인가 논 사이로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10 월  6 일 ,  윗칸은 이미 엉망이다 .  어떤 동물인지는 몰라도 산 쪽에서 오나보다 .

쑥대밭 (2020년 10월)

땅강아지논에 고라니와 멧돼지 흔적이 점점 많아지더니 이제는 아주 제 놀이터로 아는 모양이다. 먹지도 않을 벼를 깔아뭉개 땅에 꼬라박으니 그야말로 암담하다. 별안간 욕도 나온다. 전쟁이라도 벌여야 하는 건가? 시골에 살다보면 산 중턱에 버려진 논이 참 많은데 다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다섯 가지 토종벼 중에 가장 처음 모내기했던 메산디는 벌써 절반정도가 피해를 입었다. 갈 때마다 일으켜도 봤지만 될 일이 아니다.

 

10월 9일, 발걸음이 무겁다.
10 월  9 일 ,  아직 일어설 수 있는 벼는 서로 묶어줬다 .
10월 14일, 볍씨 뜯어 먹고, 그거 먹느라 다 밟고, 그치질 않는다.
10월 14일, 멧돼지는 목욕까지 하고 간 모양이다.

진흙 속에 쳐박혀서 너저분해진 볍씨들이 보이니 그냥 뒤돌고 싶어지더라.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비릿한 진흙에 뒤덮여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들은 그만 외면하고 싶더라. 그러다가 쳐박힌 벼 이삭이 모양 그대로 싹을 낸 걸 봤다. 용케 여문 벼가 진흙 속에서 따스한 볕과 물을 먹고 싹을 틔운 것이다. 

 

'너는 절망이 다가오더라도 생명임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이는 부활을 경험하는데 너는 그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맡겨진 길을 오롯이 걸어갔다.'

 

그런 마음이 썩 느껴지는 것 같아 볍씨에 비춰진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마을 사람 몇몇 부르고 특공대를 조직했다. 패배감을 등에 엎고 산산히 깨진 꿈의 볍씨를 주워 모았다. 볍씨 하나에 탄식 하나. 그렇게 그렇게 하나씩. 정성스레 씻고 말리고 까불고 밥 지어 너와 하나가 될 거다.

 

어쩌면 죽어가는 것은 도처에 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보일텐데 부끄러운 마음이란 곧 나 없음까지 이어진다. 기독교에서 잊혀진 여인들이 정성스레 기리는, 초라하게 죽은 예수. 아마도 이것이 최첨단 도시를 옆에 두고 살아가는, 여기 없이있는마을 앞에 놓인 길일까.

 

10 월  14 일 ,  땅강아지논 윗칸 .  불과 열흘 전만 해도 생긋생긋한 곳이었는데...
10월 14일, 땅강아지논 아랫칸. 벼가 더 익는 걸 기다리긴 힘들겠지?

속상한 마음까지 꼭꼭 씹어 먹기 (2020년 10월 17일)

기운 차리고 남은 벼 앞당겨 거두기로 했다. 마을사람 다 같이 모일 수 있는 날이 흙날이라 나머지 조건들이 잘 맞길 바랐는데 다행히 날씨도 좋고 다른 변수는 없었다. 이쯤 오니 옅은 가을 바람에도 여러 기억이 스친다. 둠벙 만든다고 삽질하던 때부터 볍씨 구하고 뜨거운 물에 소독하고 못자리 만들고 싹트는 거 기다리고 삽으로 쟁기질하고 써래질하고 모 심고 무너진 둑 쌓고 김 매고 그 사이 만난 땅강아지, 장구애비, 우렁이, 개구리, 뱀, 고라니, 꾀꼬리...... 이게 다 올해 일이란 게 놀랍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먼저 벼를 먹어서 속상했지만 나는 그동안 이 많은 추억 넉넉히 먹고 있었던 거다. 아, 맛있다. 정말 맛있다, 이 생명력 넘치는 논! 누구나 와서 넉넉히 누리는 논! 우리에게 주어진 것 고개 숙여 고맙게 거둔다. 하나 하나 곱씹어 먹는다.

 

아름다운 땅강아지논. 이제 거둘 차례인데 건수가 솟는 쪽은 여전히 첨벙첨벙.
오늘 우리는 이래저래 해서 요래죠래 추수할 겁니다!
볏단은 이래저래 해서 요래죠래 묶습니다! 박수~
주렁주렁 달려있던 알곡은 어디로 갔을까?
쓰러지고 밟히면서도 겨우겨우 버텼구나.
벼에 달린 게 반, 땅에 널린 게 반.
이삭아, 이삭아. 어디에 있니?
어린이, 어른이 모두 모두 벼를 벱시다.
베는 사람, 나르는 사람 그리고...
볏단 묶는 사람! 이렇게 나눠서 하면 진흙탕에서도 문제 없지.
땅강아지극장 개봉박두~
배가 고프다 했더니, 어느새 새참시간!
우리 마을은 날마다 잔치다.
진흙탕에 빠진 이삭을 구출하라.
논이 바짝 마르기만 해도 벼베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확실히 알았다.
메산디
붉은차나락
보리벼
비단찰벼
쇠머리지장
벼 베기? 아니아니, 진흙놀이 최고!

 

다 말랐다, 털자! (2020년 10월 31일)

딱 2주 말렸다. 처음 며칠은 밤이고 낮이고 그냥 볏단 세워둔 채로 말렸는데 동물들 방문 흔적이 있었다. 작전 변경! 낮에는 세웠다가 밤에는 눕혀서 방수포 한 겹 덮었다. 어디 보면 나무틀 만들고 볏단 뒤집어 말리기도 하더라. 잘 말라야 쌀알이 깨지지 않는다고 하니 해 뜰 때 볏단 세우고 해 질 때 볏단 눕히는 게 귀찮긴 해도 미룰 수가 없다.

 

그리고 2주 뒤. 드디어 턴다. 동네 초등학교에서 홀태 빌리고 근처 농부님한테 탈곡기도 빌렸다. 요즘은 낯선 이 광경에 동네 어르신들도 들러서 헐헐 웃고 가신다. 볏단이 들쭉날쭉이다보니 검불도 많이 섞여서 떨어졌다. 볏단 건네주고 탈곡기 돌리고 키질하고 남은 이삭 없나 한 번 더 확인하고. 너도 나도 바쁘다. 오늘은 결실을 보는 날이니까, 지난 여섯 달을 갈무리하는 날이니까 마냥 즐겁다!

 

비단찰벼. 2주 동안 바싹 말랐다.
우리 마을 가을 풍경.
탈곡기 돌리는 모습. 저런 모양 탈곡기는 일제시대 때 들어왔다고 한다.
키질하는 모습. 바람아, 불어라!
꼭꼭 숨은 볍씨랑 숨바꼭질.
벼에 묻어온 흙을 걸러내려면 이런 도구가 유용하다.
볍씨는 남고 검불은 가시오.
너희 눈에는 어떤 세상이 보이니?
너희가 살아갈 세상은 어떤 곳일까?
모든 게 난생 처음이었던 날.
농사지은 쌀로 밥 먹는 날이 우리에게 오고야 말았다.

영규아저씨는 네 가마 나온 땅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알뜰하게 모아봐야 고작 한 가마 나올까 말까 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열매가 적어서 속상한 마음도 잠시 스친다. 그러나 백 가마가 나오든 한 톨이 나오든 쌀밥 한 숟갈 입에 넣어 우적 씹는 순간 온 우주가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별들이 얘기해줬다) 그만큼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평생 쌀밥을 먹으며 살았지만, 단 한 톨도 제 손으로 일군 걸 먹은 적 없었다. 작은 쌀알 하나 마저도 농업 유통 구조가 아니고선 먹을 수 없으니 지금 생각으론 참 애석하다.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세상에 먹일 한 솥 밥으로 다시 태어난다. 참 맛있고 넉넉한 밥이다.

 

이런 확신이 들었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제일 가는 혁명은 없이있는마을이 땅강아지논을 일군 일이다! 그러니 바로 오늘이 독립기념일이다. 우리가 함께 나눈 흐연 쌀밥이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착한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평생 자본질서의 노예로 살았건만 처음으로 자유를 먹었다. 저기 저 쌀알처럼 다르게 생긴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한 솥 밥으로 다시 태어났다. 끊어졌던 역사가 오늘 우리 어금니 사이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니 정말 고맙고 기쁘다.

 

또 무슨 일을 벌일까? 또 어떤 사람들과 사건들을 만나게 될까? 우린 이 마을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정말 정말 신나게 '논'다. 얼쑤!

 

2021.02.09 / 글쓴이 생똥상원